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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평 === [[청평]]은 1960년 사비에트와 결별한 뒤 독자 노선을 걸었다. 두 나라는 1956년 기술 협력 협정을 맺었으나, 사비에트가 경제적 이유로 원조를 끊으면서 약속했던 핵·미사일 기술은 끝내 이전되지 않았다. 청평 지도부는 이를 배신으로 받아들였고, 1960년대 내내 사비에트를 혁명을 버린 수정주의 국가로 비난했다. 1966년 시작된 문화대혁명은 국가 기구를 마비시켰다. 당 중앙의 이론가 집단이 동원한 청년 조직이 각지의 당 위원회와 행정 기관을 장악했고, 지방 관료와 지식인 수십만 명이 '반혁명 분자'로 몰려 하방되거나 투옥되었다. 당과 정부의 관료 조직이 공격 대상이 되면서 행정은 멈췄고, 군만이 유일하게 기능하는 국가 기구로 남았다. 이 혼란은 대외 관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청평은 사비에트와도 자유진영과도 적대하는 고립 상태에 빠졌다. 청평의 대외 무역은 1960년대 후반 크게 줄었고, 군의 장비는 1950년대 사비에트제의 노후화가 진행되는데도 교체되지 못했다. 사비에트와의 결별로 끊긴 부품과 기술은 국내 생산으로 메워야 했지만, 문화대혁명의 혼란 속에서 방위산업도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1969년 3월에는 북산과의 국경에서 히노타니 교전이 벌어졌다. 문화대혁명기의 청평이 외부에 대한 강경 노선으로 내부 결속을 꾀하던 시기였다. 1970년 지도자 려우 즈카이가 죽은 뒤 청평은 극심한 권력투쟁에 빠졌다.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당 이론가 집단과, 혼란을 수습하려는 군 지휘부가 후계를 두고 맞섰고, 1971년과 1972년 두 차례 지도부 숙청이 이어졌다. 권력투쟁은 1973년까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1971년에는 국방부장이, 1972년에는 문화대혁명을 주도한 당 이론가 집단의 핵심 인물이 차례로 실각했다. 숙청이 거듭될 때마다 군 지휘관들이 교체되었고, 국경 지대의 부대들도 지휘 공백을 겪었다. 북산 군부는 이 혼란을 침공의 기회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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